나는 만화를 정말 좋아한다.
하지만 애니같은 경우는 보는 데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고, 워낙에 집중력이 안 좋아서 정말 웬만해서는 보지 않는다.
TV시리즈나 드라마같은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최근에 겜잘알 지인이 에반게리온을 강력하게 추천해주었다.
그 지인은 우울하고 심오한 이야기들에 심취해 있는데, 그녀는 내가 에반게리온을 시청하고 깊은 토론을 하자는 제안을 했다(오타쿠같다).
나 역시 그런 장르를 매우 좋아하기 때문에 한번 믿고 시리즈를 시작했다.
아래부터는 스포가 많음에 유의.

나는 거대로봇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뭐 메카 로봇물이야 수십년 전에나 유행하던 장르이니 내가 접할 만한 건 거의 없기는 했지만, 그나마 유행하던 트랜스포머 시리즈 역시 남들 다 볼때 안 봤다.
처음 에반게리온에 대한 인식 역시 그거였다.
이거 그냥 메카물 아니야?
그런데 이 작품은 시작부터 '그냥 메카물'은 아닌 느낌을 좀 준다.
일단 로봇('에바'라 불림)이 다치면 피가 나온다.. 그냥 로봇이 아니다. 막 자기혼자 움직이기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한다.
또한 에바는 아무나 타거나 조작할 수 없다.

무슨 사람마다 싱크로 같은 게 되는 게 있어서 그 싱크로가 안 맞는 사람이 타면 아예 안 움직이고 심지어 죽을 수도 있다.
그래서 이렇게 한 눈에 봐도 개찐따처럼 생긴 주인공만 탈 수 있다.
물론 위에 사진에 보듯이 에바도 종류가 여러 대라서 다른 애들도 있긴 하지만, 설정상 주인공만 탈 수 있는 저 보라색 에바가 짱짱 쎄서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얘는 생긴것뿐 아니라 성격도 찐따다.
얘는 이 로봇에 타서 거대괴물들을 죽이지 않으면 지구가 멸망한다고 설명을 해 줘도 나는 이런거 타기 싫어요~ 무서워요~ 하고 찡찡댄다.
이게 일반적인 메카물과의 차이 같다.
보통 이런 이야기는 열심히 주인공과 친구들이 세계를 구하기 위해 악당을 물리치며 그 과정에서 누가 죽거나 다치기도 하고, 그럴수록 결의를 다지며 수련도 하고 연습도 하고 그런다.
그런데 얘같은 경우는 세계를 구하려는 마음도 하나도 없고, 딱히 그런 거에 신경조차 안 쓴다.
얘는 로봇 타기 싫은데 잘 타면 아빠(얘 아빠가 세계 수호 조직의 수장인데, 몇년간 연락도 없다가 갑자기 로봇 타라고 불렀다)가 칭찬해줘서 타는 앤데, 아빠가 좀 다그치거나 싸우다 좀 다치면 '나 이제 안함 ㅅㄱ' 이러고 동네 떠나려 한다.
그러다 보통은 설득당해서 돌아오거나(사실 설득이라기보단 '뭐, 안 타는건 니 맘이긴 한데 또 도망칠거야 찌질아? 평생 그렇게 도망만 치네..' 이런식으로 얘 멘토같은 눈나가 갈군다) 자기 친구들 다치고 동네 부서지는거 보면 돌아와서 탄다.
그런데 이게 어느정도 이해가 되기도 하는 게, 에바와의 싱크로라는 게 신경도 막 연결되고 그런 거라서 로봇이 부서지면 파일럿도 똑같은 고통을 느낀다. 에바와 싱크로가 잘 될수록 더 잘 느끼는데, 주인공은 싱크로 재능충이기 때문에 설정상 제일 큰 고통을 느낄 것이다. 그런데 싸울때마다 팔이 뽑혀나가고 몸 뚫리고 그러다 보니 어느날 갑자기 끌려와서 세계를 구해야된다며 억지로 로봇에 타게 된 중학생 주인공이 살짝 불쌍하긴 하다.
주인공이 로봇 타는 거에 하도 괴로워하다 보니 어차피 탈거면서.. 란 생각에 짜증이 나면서도 어느정도 공감이 좀 된다. 그리고 약간 날씨의 아이를 보면서 느꼈던, 사회 교과서에서나 볼법한 주제가 얼핏 떠올랐다.

과연 공공의 이익을 위해 개인의 희생을 강요해도 되는가? 아무리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라지만 우리는 저 찐따같고 겁 많은 주인공이 매일 사지가 찢기는 고통 속에서 싸우라고 내몰아도 되는 것인가?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괴로워 하면서도 주인공은 로봇을 타면서 타인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스스로의 가치를 인정받아가며 썩어있던 내면이 조금씩 치유되어가고 자존감도 되찾고 한다.
좀 우습게 말했지만, 사실 주인공이 로봇을 타는가 마는가에 대한 고뇌는 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심각한 고민이다. 그리고 비단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파일럿들도 에바를 타는 이유에 대해 꽤나 깊이 있게 다룬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이 작품 내 모든 캐릭터들에게는 트라우마나 상처가 하나씩 심어져 있다(대부분은 막장 부모 때문이다). 괴물들이 꾸준히 침략해오며 그 상처들이 계속해서 드러나고 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에반게리온은 그런 상처들을 다루는 게 목적인 작품이다. 스토리가 진행되고, 작품이 후반부로 갈수록 뭔가 괴물들의 침략같은 건 별로 중요하지도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게 메인 스토리라인이지만 정말 하나의 초거대 맥거핀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괴물들은 그 자체로는 크게 의미를 가지지 않고, 하나의 트리거같은 역할만 할 뿐이다.
심지어 괴물들의 정체는 끝날 때까지 나오지도 않고, 작품 내내 떠들던 클라이맥스 느낌 풀풀 풍기던 인류보완계획이나, 누가봐도 흑막같은 비밀 단체 제레, 각종 극비사항이 담겨있는 것처럼 나오던 사해 문서 등등 중요해 보이던 것들도 정체가 제대로 나온 게 하나도 없다. 물론 우리의 주인공도 이런 것들에 대해선 거의 존재조차 모르고 끝나게 된다.
여하튼 이 작품의 핵심 주제는 상처받은 청소년들이여, 상처를 딛고 앞으로 나아가자, 뭐 이런 거다. 이때 뭐 타인과의 교감이나 타인 속의 나, 내 안의 타인 뭐 이런 것들이 핵심 키워드인 거 같은데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어쨌든 결국 주인공은 마지막 화에서 완전히 치유된 듯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름대로 해피엔딩같은 분위기를 풍긴다.
그런데 그런 멋진 주제를 담고 있는 것 치고는 주인공을 제외한 다른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채 죽거나 폐인이 되는 등 파국을 맞이한 점이 참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그렇게 안타깝기 때문에 이 작품이 명작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괴물들도 멋지게 물리치고, 주인공도 주인공 친구들도 일상으로 복귀해 자신감을 갖고 앞으로를 살아가는 무난한 엔딩이었다면 개운하기야 했겠지만 크게 여운을 남기지는 못했을 것이다.
사실 마지막화를 보고 나서 나는 심기가 매우 불편했다. 아니 그래서 그 비밀 계획이랑 문서랑 그런 것들은 대체 정확히 뭔데? 폐인 된 애들은 앞으로 어떻게 사는데? 괴물들은 이제 안오는 건가? 뭐 이런 의문점들이 남아서 나무위키를 찾아보기도 했다.
나무위키의 분량은 실제 작품보다도 훨씬 방대했다. 내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분에 대한 명확한 설명들도 있었고, 해석에 관해 사람들 간의 의견이나 견해 차이나, 각종 떡밥에 관한 추측성 글도 많은 걸 보니 정말 잘 만들었구나 싶기도 했다.
원래는 깔끔한 결말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이렇게 각종 의문점들을 남기고 그것에 대해 소비자들이 상상하고, 이야기를 직접 채워 나가게 만드는 것도 가끔은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들게 하는 작품이었다.